평화의 인사 오월 아기가 주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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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 건너 숲 작성일 06-05-15 12:21 조회 20,703회 댓글 0건본문
요즘에 들어서도 가끔 떠오르는 아기가 있다. 아기의 이름은 마이클이다.
그런데 시간이 꽤 흐른 까닭에서인지 마이클은 벌써 한편의 꿈처럼 다가온다. 불과 서너 해 전만 해도 녀석은 마음 속에만 고여 있지는 않았었다. 이를테면 길가에서 우연히 또래의 아이들과 마주칠 때면 녀석은 어느새 가슴 께로 짬조롬하게 번져가며 불현듯 제 존재를 알리곤 했었다. 헌데 그 아기는 정작 지금은 여덟 살이나 됐고 제법 사내 티마저 난다. 그리하여 지금은 내 기억의 하상 위로 두둥실 떠오른 아기. 아기는 더없이 편안해 보이고 나도 덩달아 푸근해진다. 실상 바뀐 건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시간만이 우리를 배반한다고 할까. 옛날은 심상의 그물에 그렇게 새겨지고 행복했던 순간들은 마음의 침전물로 가라앉는다.
내가 마이클을 만난 때는 뉴질랜드의 1998년 겨울이었다. 추위가 오슬오슬 파고들던 그날 녀석은 생후 3개월 된 한줌의 갓난 아기였다. 아내가 처음 보모 일을 한다고 했을 때 나는 반대했었다. 남의 아기 돌봐주는 일은 너무나 조심스럽고 어렵다는 게 내 이유였다. 하지만 만남은 운명적으로 예비되어 있었는가 보다. 어느날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 보니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아기가 눈에 들어왔다. 꺼질 새라 이불을 들추고 녀석을 봤다.
아니이녀석누구야/마이클이래/뉘집아기야/저기잘아는이웃집/우리이름은없나/가톨릭이름인데천사장이래.
아아 어쩌면 녀석은 이리도 고요할까. 서늘한 눈매에는 선기 같은 것이 어른거렸다. 난 아기에게서 거룩한 기운마저 느꼈다.
한국식이름도지어주자/얘는뉴질랜드시민이야마이클김이면돼/으응그렇긴한데.
정말로 한 순간에 녀석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반대를 언제 했냐 싶었다. 아내의 처음 의도는 일종의 동업자 의식에 있었을 게다. 말하자면 아기 보는 일은 서로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는. 그날 이후 마이클은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내 곁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한 두달쯤 지난 때였을까 아내의 충고는 색달랐다. 즉 남의 아기도 좋지만 당신 딸내미부터 챙기라고. 아니나 다를까 머리가 다 큰 딸은 의심에 찬 질문까지 던졌다. 자기가 아기였을 때도 그렇게 정성스러웠느냐는 거였다. 그리곤 결론까지 맺어줬다. 평소의 모습으로 판단하건대 남아선호와는 거리가 멀고 딸 하나에 대한 불만은 결코 아닐 터이므로 결국 아빠의 휴머니즘적 감수성의 문제라고.(지금 생각해 봐도 괜찮은 해석이다^^).
돌이켜 보면 마이클은 뗄 수 없는 가족이자 언제나 우리에게 웃음을 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그리고 그 웃음은 우리들에게 빛이 되면서 삶의 약동감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영민해서인지 배우기도 잘 해 두 살 때는 '영감' 소리를 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녀석을 보면서 그렇게 두 해를 같이 보냈다. 마이클은 내게 언제나 우뚝한 존재였다. 바야흐로 새천년을 맞이하던 때, 내가 배우던 언어문화학이 끝나갈 즈음 나는 어학경연대회에 자신 있게 나갔다. 남들이 그 밥에 그 나물인 소재로 끙끙거렸지만 마이클이야말로 내겐 독창성의 젖줄이 돼줬다. 필경 그 바람에서였을 거다. 무서운(?) 2-30대들을 물리치고 나는 마침내 상까지 탔고 상금은 자연히 마이클에게 되돌려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이 오클랜드를 떠나야만 했을 때가 가장 어려웠다. 마이클은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울었다. 듣자하니 울다 그치다를 반복하며 한동안 밥도 걸렀다 했다. 마이클 아버지가 언젠가 말했다. 사람의 육정이란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므로 때로는 멀리 해야 한다고. 육정이란 말이 참 낯설기만 했다. 그럼 이와 다른 성질의 사랑이란 어떤 형태일까. 그의 종교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처음에 이 말은 교조적 싸늘함 이외 아무 것도 아니었다. 굳이 생의 활력을 훼절하려 들다니. 영이든 육이든 분리는 아프지 않은가. 허나 나중이긴 하지만 아기의 아버지가 옳다는 생각도 여러 번 해봤다. 그건 어쩌면 몰래 헤어진 데 따르는 미안한 감정에서였을 거다.
어쨌든 그후 난 훌쩍 커버린 마이클을 실제로 두 번 만났다. 물론 마이클은 더 이상 그 아기가 아니었다. 영어에 비해 우리말이 어설픈 점도 조금 섭섭했다. 다시 딸이 일깨워줬다. "아빠 아들이었으면 좋겠지^^? 현실은 아니잖아. 그러나저러나 머리가 커진 마이클은 이제 아빠를 생각하지도 않는데". "그렇긴 한데 어째 너무 허전해서 그렇다".
아기는 푸르른 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뻗으면서 변화해 간다. 만나고 헤어짐이란 우리가 그러한 끊임없는 변화 한가운데 서있다는 뜻도 된다. 게다가 서있는 땅이 다르다. "하느님 뉴질랜드를 도우소서"란 국가는 다름아닌 마이클의 것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남과 북이란 우스꽝스런 분리가 없다. 이쯤에서 애렴이란 말이 떠오른다. 불가에서 왔다고 하는가. 이처럼 간결하고 투명한 표현이 있을까 싶다. 화선지에 먹물이 번져가듯 사랑이 물들어간다는 말이다. 거기에는 이를테면 자연스런 감정을 거스르지 않되 한결 고즈넉한 관조의 눈길이 있다.
벌써 여러 해 전이 돼버렸다. 남북정상이 평양에서 두 손을 마주 잡았던 날, 제일 먼저 머리를 치고 간 얼굴이 마이클이었다. 그 얼굴 위로 남북한 어린이 얼굴들이 이윽고 포개졌을 때 새삼 뛰던 맥박과 더불어 찌르르 아픔이 번져나가던 체험. 참으로 선연했다. 그렇다. 그것이 어떤 마음의 기제에서이든 그 아기의 심상은 꽤 오랜 동안 그리움의 샘으로 자리잡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라건대 그런 그리움이 '현실'의 마이클과 만난다면 더할 나위없이 기쁜 일이겠다.
그런데 시간이 꽤 흐른 까닭에서인지 마이클은 벌써 한편의 꿈처럼 다가온다. 불과 서너 해 전만 해도 녀석은 마음 속에만 고여 있지는 않았었다. 이를테면 길가에서 우연히 또래의 아이들과 마주칠 때면 녀석은 어느새 가슴 께로 짬조롬하게 번져가며 불현듯 제 존재를 알리곤 했었다. 헌데 그 아기는 정작 지금은 여덟 살이나 됐고 제법 사내 티마저 난다. 그리하여 지금은 내 기억의 하상 위로 두둥실 떠오른 아기. 아기는 더없이 편안해 보이고 나도 덩달아 푸근해진다. 실상 바뀐 건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시간만이 우리를 배반한다고 할까. 옛날은 심상의 그물에 그렇게 새겨지고 행복했던 순간들은 마음의 침전물로 가라앉는다.
내가 마이클을 만난 때는 뉴질랜드의 1998년 겨울이었다. 추위가 오슬오슬 파고들던 그날 녀석은 생후 3개월 된 한줌의 갓난 아기였다. 아내가 처음 보모 일을 한다고 했을 때 나는 반대했었다. 남의 아기 돌봐주는 일은 너무나 조심스럽고 어렵다는 게 내 이유였다. 하지만 만남은 운명적으로 예비되어 있었는가 보다. 어느날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 보니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아기가 눈에 들어왔다. 꺼질 새라 이불을 들추고 녀석을 봤다.
아니이녀석누구야/마이클이래/뉘집아기야/저기잘아는이웃집/우리이름은없나/가톨릭이름인데천사장이래.
아아 어쩌면 녀석은 이리도 고요할까. 서늘한 눈매에는 선기 같은 것이 어른거렸다. 난 아기에게서 거룩한 기운마저 느꼈다.
한국식이름도지어주자/얘는뉴질랜드시민이야마이클김이면돼/으응그렇긴한데.
정말로 한 순간에 녀석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반대를 언제 했냐 싶었다. 아내의 처음 의도는 일종의 동업자 의식에 있었을 게다. 말하자면 아기 보는 일은 서로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는. 그날 이후 마이클은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내 곁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한 두달쯤 지난 때였을까 아내의 충고는 색달랐다. 즉 남의 아기도 좋지만 당신 딸내미부터 챙기라고. 아니나 다를까 머리가 다 큰 딸은 의심에 찬 질문까지 던졌다. 자기가 아기였을 때도 그렇게 정성스러웠느냐는 거였다. 그리곤 결론까지 맺어줬다. 평소의 모습으로 판단하건대 남아선호와는 거리가 멀고 딸 하나에 대한 불만은 결코 아닐 터이므로 결국 아빠의 휴머니즘적 감수성의 문제라고.(지금 생각해 봐도 괜찮은 해석이다^^).
돌이켜 보면 마이클은 뗄 수 없는 가족이자 언제나 우리에게 웃음을 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그리고 그 웃음은 우리들에게 빛이 되면서 삶의 약동감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영민해서인지 배우기도 잘 해 두 살 때는 '영감' 소리를 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녀석을 보면서 그렇게 두 해를 같이 보냈다. 마이클은 내게 언제나 우뚝한 존재였다. 바야흐로 새천년을 맞이하던 때, 내가 배우던 언어문화학이 끝나갈 즈음 나는 어학경연대회에 자신 있게 나갔다. 남들이 그 밥에 그 나물인 소재로 끙끙거렸지만 마이클이야말로 내겐 독창성의 젖줄이 돼줬다. 필경 그 바람에서였을 거다. 무서운(?) 2-30대들을 물리치고 나는 마침내 상까지 탔고 상금은 자연히 마이클에게 되돌려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이 오클랜드를 떠나야만 했을 때가 가장 어려웠다. 마이클은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울었다. 듣자하니 울다 그치다를 반복하며 한동안 밥도 걸렀다 했다. 마이클 아버지가 언젠가 말했다. 사람의 육정이란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므로 때로는 멀리 해야 한다고. 육정이란 말이 참 낯설기만 했다. 그럼 이와 다른 성질의 사랑이란 어떤 형태일까. 그의 종교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처음에 이 말은 교조적 싸늘함 이외 아무 것도 아니었다. 굳이 생의 활력을 훼절하려 들다니. 영이든 육이든 분리는 아프지 않은가. 허나 나중이긴 하지만 아기의 아버지가 옳다는 생각도 여러 번 해봤다. 그건 어쩌면 몰래 헤어진 데 따르는 미안한 감정에서였을 거다.
어쨌든 그후 난 훌쩍 커버린 마이클을 실제로 두 번 만났다. 물론 마이클은 더 이상 그 아기가 아니었다. 영어에 비해 우리말이 어설픈 점도 조금 섭섭했다. 다시 딸이 일깨워줬다. "아빠 아들이었으면 좋겠지^^? 현실은 아니잖아. 그러나저러나 머리가 커진 마이클은 이제 아빠를 생각하지도 않는데". "그렇긴 한데 어째 너무 허전해서 그렇다".
아기는 푸르른 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뻗으면서 변화해 간다. 만나고 헤어짐이란 우리가 그러한 끊임없는 변화 한가운데 서있다는 뜻도 된다. 게다가 서있는 땅이 다르다. "하느님 뉴질랜드를 도우소서"란 국가는 다름아닌 마이클의 것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남과 북이란 우스꽝스런 분리가 없다. 이쯤에서 애렴이란 말이 떠오른다. 불가에서 왔다고 하는가. 이처럼 간결하고 투명한 표현이 있을까 싶다. 화선지에 먹물이 번져가듯 사랑이 물들어간다는 말이다. 거기에는 이를테면 자연스런 감정을 거스르지 않되 한결 고즈넉한 관조의 눈길이 있다.
벌써 여러 해 전이 돼버렸다. 남북정상이 평양에서 두 손을 마주 잡았던 날, 제일 먼저 머리를 치고 간 얼굴이 마이클이었다. 그 얼굴 위로 남북한 어린이 얼굴들이 이윽고 포개졌을 때 새삼 뛰던 맥박과 더불어 찌르르 아픔이 번져나가던 체험. 참으로 선연했다. 그렇다. 그것이 어떤 마음의 기제에서이든 그 아기의 심상은 꽤 오랜 동안 그리움의 샘으로 자리잡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라건대 그런 그리움이 '현실'의 마이클과 만난다면 더할 나위없이 기쁜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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