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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자료실 숭례문 화재의 인연-한겨레신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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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mos 작성일 08-02-21 12:13 조회 14,907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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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화재의 인연

성공회 사제 /성공회대 교수 (종교와 과학 전공)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와 만남과 사건이 수많은 인연의 결과라고 말한다. 상대성원리와 함께 현대물리학의 한 축을 이루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원리에서는 소립자의 존재 여부를 확률로 나타낸다. 존재는 개연성의 실현인 것이다. 그리고 개연성은 앞선 사건들의 인과율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 점에서 모든 것을 인연으로 설명하는 불교와 불확정성원리는 상통한다. 양자 모두 사물과 사건을 관계의 그물로 보는 관점을 지지한다. 이런 관점에서 숭례문 화재를 보면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까? 숭례문 화재의 개연성이 현실화되는데 중요한 인연의 사슬들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1. 화가 난 어떤 사람이 경비가 허술한 숭례문에 잠입해 불을 질렀다.

2. 늘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서울시장이 되어 숭례문을 일반인에게 개방한다.

3. 한 건설회사의 아파트 공사에 자신의 집을 수용 당한 그 사람은 기대보다 적은 토지 보상금 때문에 불만을 품게 된다.

4. 서울시장이 되기 오래 전에 그는 바로 같은 건설회사의 사장이 되어 아파트 공사 등으로 성공하여 샐러리맨의 신화를 이룬다.

   오랜 인연의 그물에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숭례문 화재의 개연성이 현실로 이루어지기까지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인연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토지보상금 문제로 관련기관에 진정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점이라든지, 화재방지 시스템을 보완할 기회를 무시한 것이라든지, 당일 발화지점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찾아내지 못했던 점 등이다. 이러한 인연들이 그물처럼 얽혀서 우리는 숭례문을 잃었다. 온갖 난리와 풍상을 견디며 육백년을 버텨온 숭례문이었는데 말이다. 이는 어쩌면 ‘예를 숭상하는 마음’을 잃은 지 오래된 우리들에게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나라당의 어떤 의원은 화재가 나자마자 노대통령 탓이라고 잽싸게 불똥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네 탓이오!’ 논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앞으로 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불행한 개연성의 실현 여부에 관심이 있다. 왜냐면 지금 우리의 사고와 행동이 바로 미래에 일어날 일의 인연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한반도 대운하로 관심이 간다. 약속한 7% 경제성장이 불가능해 보이자 우선 땅을 파고 물길을 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라도 만들어 보고자 하는 심정이 이해가 안가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한 바탕 잔치의 대가로는 강산의 상처가 너무 깊고 닥쳐올 재앙이 가히 두렵다. 환경위기의 시대에 생태자원의 경제적 가치는 재평가되어 급격히 상승하게 될 것이다. 환경 근본주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용적 관점에도 보더라도 그렇다. 유럽에서도 사양길에 접어든지 오래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하상계수를 지닌 우리나라에서 운하는 전혀 실용적이지 못하다. 하상계수는 강이나 하천의 수량의 변동 비율을 뜻한다.

   처음 유럽에 갔을 때 템즈 강이나 쎄느 강의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꼈었다. 강둑이 높지 않아 주위의 건물들과 강물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고, 수면에 맞닿아 뻗어있는 강변길이 운치가 있어 보였다. 우리의 한강변의 풍경과 사뭇 달랐다. 그 다른 이유를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유럽은 매월별로 강수량의 변화가 별로 없다. 즉 하상계수가 매우 낮다. 영국의 경우 겨울철에 약간 많을 뿐 우리나라처럼 장마철이나 집중호우가 거의 없다. 만일 한강 둑을 쎄느 강처럼 쌓았다면 매년 범람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힐 것이다. 장황하게 유럽이야기를 한 이유는 운하가 우리나라 자연환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대선 중 여론조사 기간에도 한반도대운하 공약에 대해서는 이명박 후보 지지자 가운데서도 반대여론이 약간 높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꼭 해야 할 당위가 없다. 건설회사 출신이라서 꼭 공사판을 벌이고 싶다면 경부 고속도로의 확장(고가차도 신설)이나 철도의 증설을 고려해보면 어떨까? 정녕 운하를 건설해야 직성이 풀린다면 경인운하에 국한하여 검토해보라. 한강하구에서 강화까지의 물길은 수면 차이가 크지 않고 강폭도 넓어서 한반도 대운하에 비하면 공사가 훨씬 수월하고 환경훼손도 덜하리라 생각된다.

   육백년 숭례문이 검은 숯으로 무너져 내렸지만 행여 이렇게라도 위로하는 마음을 가져볼까 한다. 숭례문 화재가 인연이 되어 한반도 대재앙을 불러올 운하를 막게 되었다고 말이다. 들끓는 민심에 점령군 같던 인수위의 기세가 다소 주춤한 듯하다. 이제라도 모든 정책을 시행하기에 앞서 강산의 뭇 생명들과 생태계 앞에 겸손히 예를 차리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산하를 지켜내기 위해서인가? 숭례문은 한줄기 향으로 살라져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보내기 서럽지만 눈물을 머금고 좋은 인연으로 승화해내자. 잃어버린 예를 되살려 남은 문화재들과 금수강산과 뭇 생명들을 지켜내자. 나무가 나무와 더불어 숲을 지키듯이.

2008.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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