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인사 몽돌도 생명의 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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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 건너 숲 작성일 08-01-09 17:34 조회 15,713회 댓글 0건본문
태안 앞바다를 침노한 ‘검은 재앙’이 있은 지 얼추 한 달이 지난 1월5일. 성공회 환경연대가 3차 자원봉사활동을 펼쳤다. 새벽녘의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대성당에 모인 사람들은 67명. 청소년 교우들을 위주로 짠 행사지만 어른들도 절반 정도는 된다. 인솔자는 얼마 전 발족한 성공회환경연대의 최상석 아타나시우스 신부. 그리고 성직자론 성북 나눔의 집 오정렬 신부와 대성당의 신부님 한 분이 더 참석했다. 고속도로를 타고 현장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각자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숫자로만 보면 대성당이 제일 많고 그 다음은 성북 나눔의 집, 대학로, 약수동, 수원교회 순이고 동대문교회에선 김인응 형과 나 둘이다. 제1차 활동 때 남 몰래(?) 홀로 다녀간 이장근 사제회장의 뒤를 이어 두 사람이 합류한 셈이다.
성공회 교우가 아닌 분들도 있었다. 가톨릭 연희동 성당을 다닌다는 어느 엄마는 딸과 함께 왔다. 또 쉰 중반의 어떤 신사는 “고향 땅이 쑥대밭이 돼버렸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오늘 참가했다고. 그의 고향은 충남 서산이라고 한다. 버스 안에서 이 사내가 쉴 새 없이 한 곡조 뽑아 대는 바람에 심심하지 않았다. “삼각지 로오타이리이에~” 어? 그러고 보니 외모도 이재철 교우하고 많이 닮았다.
지난 한 달 사이 신문방송이 집중 조명한 탓에 태안 앞바다는 그만큼 눈에 익숙하다. 한 눈에 보면 밀려드는 바닷물과 씻기는 모래톱, 육중한 바위 덩어리들 모두 깨끗하다. 아직도 가시지 않은 기름 냄새만이 바닷가 공기를 타고 맴돌 뿐이다. 바닷가를 점령한 자원봉사자들의 행렬도 낯설지 않다. 사고 초기, 죽음의 검은 띠를 압도했던 장엄한 인간 띠에 견준다면 오늘 숫자는 매우 적은 편이다. 하지만 2000 명쯤은 좋이 돼 보이고 열정만큼은 여전히 식지 않아 보였다. 드넓은 바닷가 여기저기를 수놓은 하양, 파랑, 노랑, 잿빛의 방재복으로 무장한 젊은이들, 오늘따라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다. 하아, 욘석들, 무뚝뚝해 보이는 기다란 고무장화도 상큼하게스리 옷 색깔 맞춰^^ 신었다.
자원 봉사자들이 기름을 닦아내고 있다. 기업체, 관청, 종교단체, 지역주민, 자치단체, 학교, 가정에서 모여든 2008년 새해의 한국인들. 봉사 점수 땀시 일하는 학생들도 꽤 된다^^. 아무려면 어떠랴 예쁘기만 하다. 현장에서 무료급식소를 차려놓은 어느 감리교회 신자분들께도 박수를 치고 싶다.
불과 얼마 전, 삽으로 양동이로 드럼통에 퍼 담아야 했던 기름 더미는 지금 없다. 대신 헌옷가지와 흡착포로 바위와 자갈에 붙은 기름 더께를 닦아내고 훔쳐내야 하는 시간과 싸우는 작업이다. 우리 일행이 작업구역으로 할당받아 당도한 곳은 구름포 해수욕장 끄트머리 쪽이다. 큰 바위 작은 바위 몽돌 조약돌이 온통 거무죽죽하니 번들거린다. 하지만 한 눈에도 헤일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거쳐 간 응급작업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럭저럭 말쑥하게 보인다. 100 미터 쯤 펼쳐진 자갈밭에 앉아 작업을 시작한 때는 정오 쯤. 겨울 추위는 괜한 걱정이었다. 부드러운 바닷바람에 날씨 또한 쾌청하다.
김베드로 형은 부지런하신데다 ‘스케일’이 크시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기름이 풍성한 돌부터 훔친다. 가끔 탄식의 소리. “허이구, 이걸 도대체 어떡하란 말야.” 때때로 형은 마음이 급해지면 고효율의 작업방식을 동원한다. 즉, 흡착포를 자갈더미에 대고 발로 뭉개는 첨단 ‘공법’이다. 얼핏 ‘과격’해 보일지 몰라도 어차피 성과는 시간에 비례하여 걷어내는 기름의 총량에 달려 있다. 나는 거꾸로 처음의 자리와 방식을 고수한다. 비교적 말끔한 윗돌들을 걷어낸다. 어른 팔뚝 반 정도만 파헤쳐도 그 밑엔 섬뜩한 기름덩이들이 띠를 이루며 완강하게 붙어 있다. 그랬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해안 드넓은 모래밭 밑의 사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들었다. 작은 조약돌 하나하나마다 기름을 훔쳤다. 빛과 크기 무늬가 제각기 다른 조약돌. 아~ 문득 그 아름다움에 사로잡힌다. 오늘 취향으로 분류한다면 베드로 형은 스케일에 어울리는 고래잡이 선장이다. 나는? 새우잡이 배 선원이다.
두 시간 쯤 지나자 대성당의 중학생 녀석들이 싫증이 났는지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뛰논다. 디카 사진이 빠질 리 없다. 녀석들 그래도 예쁘기만 하다. 힘들 땐 쉬어라. 너무 엄숙한 건 대개 가짜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엄숙한 일이라 해도 반드시 흥겨운 놀이 요소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호모루덴스다. 잠깐 허리를 피고 쉬는 동작 외에 모두 열심히 일한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한다. 이때가 오후 4시. 누가 큰 소리로 말한다. “아까 해 뜨는 걸 봤는데 이젠 해 지는 걸 보는군.” 가야 할 시간이란다. 애개, 겨우 4시간 일했다. 그 동안 우리가 ‘퍼 올린’ 기름은 얼마 쯤 될까. 기껏해야 양동이 하나나 될까.
환경 및 생태 전문가들의 조언. 긴급 작업이 끝난 요즈음 자꾸 조바심에서 건드리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의 치유력에 맡겨야 한다고. 그 복원의 힘을 믿으라고. 그렇다 해도 앞으로 인력에 의한 복구 작업은 계속되어야 할 것 같다. 다만 무척 섬세하게 접근해야 한다. 이를테면 그건 조약돌 하나하나 모래 한 삼태기 바닷게와 소라의 둥지까지 보듬어 안는 고통스런 반복 작업이 아닐까. 또 하나. 대자연이 그러하듯 모든 사역은 거대한 순환이다. 하나를 살린답시고 또 하나를 죽이는 악순환을 벗어나야 한다. 가장 쉬운 예로 쓰레기. 봉사자들이 남기는 폐기물에도 당근 눈길을 줘야 한다. 뿐인가, 전국에서 태안 바닷가로 몰려든 자동차들이 내뿜는 연기도 현대산업의 정수인 기름에서 나온다. 누군가 내게 새하얀 흡착포를 건네주려다 흠칫 놀라는 표정이다. 나는 하얀 흡착포의 작은 틈도 남기지 않고 새카매지도록 썼다. 마찬가지로 헌옷도 더 이상 기름이 먹어들지 않을 때까지 썼다. 쓰레기를 줄이려고.
개체와 생명의 함성. 날아라 저 푸른 하늘로.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난 가마우지를 태안만에서 날려 보내고 있다. (한겨레에서)
공동체는 어디에서 들어도 아름다운 말이다. 허나 개체란 말 또한 그에 못지않게 아름답다. 무슨 말인가? 때때로 공동체의 함의 속에는 차이를 무시한 ‘폭력성’이 일정 부분 담긴다. IMF를 이긴 금반지 뽑기, 태안의 검은 띠를 극복한 오천만의 대교향악...우리는 위대한 한국인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상투적 언술에 마냥 찬성할 수 없는 유보 심리는 바로 거기에서 비롯한다. 밑그림을 바꿔보자. 만약 유조선에서 새어나온 기름이 태안만을 대신하여 해류 타고 황해 건너 중국을 습격했다면? 태안 앞바다에 김과 굴 양식장 해수욕장 같은 관광자원이라든가 인간을 위한 경제적 환원가치가 없는 무인도를 덮쳤다면? 그때에도 대중매체는 5천만을 들먹이고 정치가들은 너나없이 부지런히 태안만을 찾았을까? 그렇다면 다시 문제는 대자연을 순환기제로 바라보는 개체들의 자각으로 모아진다.
그러나 한편 현대문명의 온갖 혜택과 편의에 길들여진 우리가 과연 이런 자각에 이를 수 있을까. 경부충청호남을 꿰뚫는 대운하를 지지하면서 태안만의 ‘작은’ 생채기에 아파하는 건 위선 아니면 분명 자가당착이다. 환경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전쟁이란 인재에 둔감한 건 또 어떤가. 그에 대한 답변은 멀고 험난하다. 하지만 생태문제는 더 이상 강 건너 구름구경이 아니며 인류가 직면한 절박하기 짝이 없는 과제다. 세계는 하나이며 그야 말로 지구촌이다. 우리는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넘게 차지하는 중국과 인도 아프리카 민중들이 진정 잘 살기를 바란다.
허나 쉬운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네들이 미국 시민과 비슷한 생활수준을 누리려면 지구가 두 개 반 더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튼 큰 방향에선 이렇게 말해도 좋지 않을까. 이제는 인간을 포함하여 생명 개념을 무생물에게까지 확장하여야 한다고. 그 점에서 지구는 가이아*가 다스리는 하나 뿐인 우리의 푸르른 별이다. 태안 앞바다 몽돌 하나를 공격한 기름 덩어리는 가마우지와 뿔논병아리가 뒤집어 쓴 기름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가이아- 헬라 말. 대지의 여신. 영국 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70년대 후반 주창한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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