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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인사 살람 알라이쿰(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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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 건너 숲 작성일 06-04-19 12:17 조회 58,12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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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살> 마리암의 눈물



마리암은 이란에서 왔다. 테헤란에서 의대와 법대를 졸업한 변호사다. 두 해 전 미국의 한 로스쿨 인권법 과정에서 만난 그는 가끔 네살배기 딸 니키를 학교에 데려왔다. 요즘, 외신에서 이란의 핵 위기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나는 그를 떠올리며 깊은 숨을 쉬게 된다.

마리암은 두말할 것 없이 이슬람 기성 체제에 비판적이었다. 여성 차별이나 개종 금지 등을 거론하며 그는 “종교의 목적은 생명과 정의를 넘치게 하는 것인데, 1400년 전 만들어진 규범을 그대로 따른대서야 어찌 그 목적을 이루겠느냐”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작심하고 조국을 떠난 듯했다. 지금도 미국에 남아 이란 인권 엔지오에서 일한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 정부 작용으로 국외에서 피살된 이란 사람들의 사례를 조사하는 게 요즘 그의 일이다.

그런 마리암이 독실한 이슬람교도라는 것은 뜻밖이었다. 그에게 이슬람은 인류 보편의 인권과 얼마든지 조화되는 신앙이었다. 일부다처제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이렇다. 코란에는 여러 부인을 똑같이 대하라는 구절과 인간으로서 그러기는 어렵다는 구절이 함께 실려 있다. 결국 코란의 참뜻은 마호메트 당시 만연하던 일부다처제에 대한 완곡한 금지였다. 그는 “선지자 마호메트가 살아 있다면 코란의 원칙들을 새롭게 정의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당연한 귀결로, 그는 이슬람 세계의 인권상황 개선을 서구의 주도로, 특히 물리력에 기대어 이루려는 태도를 반대했다. 그해 겨울 한 수업시간에 ‘미국이 자위적 차원이나 인권보호를 목적으로 군사적 개입을 하는 게 타당한가’를 두고 미국 학생들과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도 이란의 핵 문제가 불거졌던 터라 이라크와 이란이 동시에 도마에 올랐다. 9·11의 최면에 걸려 있던 사회 분위기 그대로, 교실은 강경론자의 차지였다. 수업 뒤, 햇살이 비껴드는 도서관 한켠에서 분을 삭이며 울고 있는 마리암을 보았다. 몇몇 외국인 학생들이 그의 옆을 지켜줬다.

“미국이 이란을 침공하면 나는 돌아가 싸우겠어!” 떨리면서 단호한 음성이었다. 어린시절 이란과 이라크가 벌인 전쟁에서 수많은 친척과 이웃의 죽음을 목격했던 그는 이란의 기성 체제만큼이나, 이란을 긴장으로 몰아가는 미국인들의 태도에도 몸서리쳤다. 무슬림으로서의 자존, 인류 보편의 권리인 인권, 평화라는 절대적 가치 …. 이 모두 모순 없이 한데 엉겨, 36.5℃의 눈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들먹이는 마리암의 어깨를 바라보며, 위로의 표현을 궁리하는 대신 그의 ‘이란’에 우리의 ‘북한’을 대입해 보고 있었다. 우리의 인권 방정식에 똬리 튼 ‘반미’와 ‘반북’의 모순을 그의 눈물로 풀어보고 싶었다. 최근 미국 인권단체 ‘휴먼 라이츠 워치’의 아시아 책임자 브래드 애덤스는 ‘강정구 교수 기소’와 ‘북한인권에 대한 미온적 태도’ 두 가지를 들어 한국 정부를 비판했다. 이와 달리 북한인권을 말하며 강 교수 처벌을 주장하거나, 강 교수 처벌을 비난하며 북한 인권에 침묵하는 현상은 인권의 이름에 대한 모독이자 우리가 풀어던져야 할 모순의 방정식이다.

2006년 봄, 다시 울고 있을지 모를 마리암에게 그 겨울 못한 위로의 말을 전해야겠다. 한반도가 그래야 하듯, 페르시아만도 평화가 넘치기를. 네가 갈망하는 생명과 정의의 세상이 알라의 이름으로 그곳에 임하기를. 그리하여 네 고향땅에 누구의 피흘림도, 억눌림도 더는 없기를. 니키의 맑은 눈이 낯선 나라에서 피로에 지쳐가기 전, 네 가족의 영혼에도 마침내 평화가 깃들기를. 살람 알라이쿰.


박용현 24시팀 기자 piao@hani.co.kr (2006년 4월 19일 <한겨레> 인터넷 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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