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인사 Re: 성공회 묵주기도 - 나성권 시몬 신부 특강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도미니꼬 작성일 06-03-09 12:08 조회 20,433회 댓글 0건본문
2월 26일 오후 2시.
오늘은 성당에서 나성권 시몬 신부님의 묵주 강연이 있었다.
GFS회 주최라 하니 결국은 어머니회가 여는 셈. 그래서인지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인 분들도 대개는 엄마들이다. 새삼 애찬을 준비하는 일상사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성공회 묵주'를 소개하랴 팔랴 부산하기만 한데, 짬을 이용한 사전 모임에서 묵주기도를 실연해보는 교우들도 예외없이 여성 분들이다.
마리아, 엘리자벳, 헬레나, 앵니스, 베로니카, 모니카, 에스터, 미리엄, 세실리아...이름만 들어도 뭔가 장엄해지지 아니한가. 이에 견줘 아버님들의 담화는 훨씬 '실용적'이시다. "어? 묵주? 난 이거 벌써 세 개째야. 우리 집에도 많고". "구슬은 전부 33개지. 무식한 애들이 이걸 알려나". "이거 얼마야? 8천원?"
그러는 한편으론 예의 고담준론도 오간다. "거 도올 선생은 좌우지간 아는 게 무진장이야. 난 그 사람 괜찮더라". "헌데 그 사람은 학자가 아니야. 자기 지식에 빠져 오만하게 세상사를 굽어본다는 데 우선 문제가 있어. 그게 어디 제대로 된 학자가 취할 바인감"(곁가지 얘기이지만, 문득 도올을 변호하고 싶어진다. 실상 오늘의 주제와 전혀 무관하지도 않다).
청중은 예순 명 정도. 이미 예견했듯 남자들은 소수다. 게다가 '당연직'이 태반이다. 전/현직 신자회장님, 사제회장님, 박완준님, 재정위원님, 디모데회 회장님 등의 면모가 당당하다. 그럼에도 의무이겠거니 하는 에누리에 빛이 바래(?) 그 신실함이 이래저래 '손해 보고' 들어간다.
오늘의 스승 나시몬 신부님. 그럴싸 해서 그런지 첫 인상이 참으로 해맑다. 시작부터 제절로 이러한 기류가 전파됐음인지 이앵니스님이 제의한다. "앞 좌석에는 잘 생긴 사람들이 앉으세요." 어떻게 하겠는가? 난 군말 못하고 겸손하게 뒷 좌석으로 퇴각했다. 동대문교회 관할사제 안철혁 신부님의 처지도 비슷하다. "나 신부님은 묵주기도의 전문가이십니다. 또 저보다 잘 생기셨고요!". 그런데 정작 나시몬의 자평은? "절 잘 보세요. 어딘가 산만하게 생겼죠?" 사이를 두지 않고 웃음을 터뜨리는 분들-여성 교우님들이다.
나시몬님의 강의는 쉽고 편안하다.
"현대인은 몹시 바쁩니다. 일에 쫓기고 스트레쓰에 치이고 걱정하느라 찌들어갑니다. 이럴 때 주님께 기대어 고요함 속에서 간절히 염원하는 데 묵주기도의 뜻이 있습니다. 오래 기도 드린다고 꼭 좋다고 볼 순 없고 간절하게 염원하는 게 중요합니다. 옛날 일이지만 전 꽤 노력했는데도 방언이란 걸 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묵주기도에서 평화를 체험하는데 시간은 대개 20분 정도 걸립니다."
모름지기 우리가 쓰는 언어가 사유의 틀을 이룬다는 건 상식에 가깝다. 그런 뜻에서 "현대인"과 "고요함"은 이미 날 선 질문이 된다. 여기에서 현대인이란 함의는 유비를 불러온다. 이를테면 현대와는 다른 고전적 인간이라든가 지금은 잃어버린 시원적 고향을 갈망한다든가.
예전은 형식을 중심 얼개로 삼는 바, 성공회 묵주기도는 이렇게 이루어진다.
묵주에는 모두 33개의 구슬과 하나의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 바로 위의 구슬이 초대구슬이고 나머지 4개의 큰 구슬은 십자구슬이다. 그리고 작고 제일 많은 28개(7 개씩 4 식)의 구슬을 주간구슬이라 한다. 기도하는 순서는 십자가부터 (1)초대구슬-(2)십자구슬-(3)주간구슬로 이어지며, (2)(3)번을 3바퀴 반복하고 다시 십자가로 귀환하면 끝난다. 그러는 동안 구슬 '징검다리들'과 십자가를 모두 합하면 숫자 100이 된다. 계산해보자. (2)(3)번을 3번 반복하면 96이 된다->[(7x4)+주간구슬4]X3=96. 여기에 맨 처음 '올라갈 때' 십자가 1+초대구슬 1을 합하면 98. 세번 반복하고 십자가로 내려올 제에는 주간구슬을 건너 뛰고 초대구슬 1+십자가 1로 내려가면 100. (만세!).
각 단계마다 기도문이 따른다.
(1) 십자가: (입 맞춘 후)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2)초대구슬: 사도신경. (3)십자구슬: 주 기도문. (4)주간구슬: 예수 기도-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5)초대구슬: 영광경-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이어 오늘 특강의 하일라이트라면 나시몬이 소개한 짧은 세 가지의 기도문. 간명해서 그런지 금방 머릿속에 쏙 들어온다.
1. 예수 기도(정교회 전통이라 한다)와 거의 같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2. 나의 주님, 나의 전부.
그럼 세번째는 뭘까?
그건 침묵이다...이건 단지 말없음일까. 아니면 고요함의 다른 이름일까. 침묵에선 높은 산정을 스쳐가는 적요의 바람소리가 난다. 그런데 그 경지조차 아닐 것이다...듣는 귀마저 없고 침묵이란 이름마저 없는 무경계의 가없는 세계일지 모른다. 거기에 열림, 투명함, 평화가 있나니. 그런데 난 왠일인지 조금 슬퍼진다^^. 그러하기에 온갖 멍에를 스스로 진 '현대인'으로선 그저 간구할 뿐인 그런 세계가 아닐까.
예수 기도와 관련, 나신부님의 추가설명이 있었다.
기도란 주님을 맞아들이는 능동적이고 기쁨에 가득찬 주체적 선포행위와 닮았다. 그렇다면 "죄인"은 좀 너무하지 않는가. 하여, "죄인" 대신 "저희들"로 하는 경우도 있다고. 아울러 자비를 꼭 불교적 용어로 볼 필욘 없으며 성경에도 자비란 말이 여러 군데에 나온다고. 이 점 나중에 애찬실에서 안스테파노님이 다시 자신의 견해를 펼치셨다.
아무래도 어머님들은 방법에 관심이 많으신듯 하다. 강의 도중 박 엘리자벳님이 던진 질문. "예수 기도"에서 "죄인"이나 "저희들" 대신 특정인을 거명하면 어떠하냐고. '손주새끼들'을 염두에 두셨을 게다. 아마도 정루시아가 더욱 예뻐지고 잘 되라고 기도하실려나 보다.
한 시간 넘게 걸린 강의가 끝난 후 애찬실에서 나 신부님께 몇 가지 주제를 여쭤봤다.
성공회의 묵주기도가 시작된 건 매우 늦은 1980년대. 가톨릭은 15세기라고. 어쨌거나 거룩함과 '신비'의 회복에 하나의 열쇠말이 있다고 느꼈다. 한편 의식으로서 묵주기도는 '개인적'이다. 예배의 장중한 질서와 성찬례의 '다중성'에 비춰본다면 말 그대로 미사는 집단적이다. 말하자면 이 양자는 서로 맞물리며 예전의 감응체계를 이룰 터이다. 나시몬님은 강의 때와 마찬가지로 귀 기울이셨고 많은 부분에서 내 질문에 선선하게 공감해주셨다.
가만 있자. 그러나 저러나 난 침묵의 기도를 벌써 까먹었는가 보다. 애찬실에선 말없이 밥 먹어야 하잖을까. 이 점에선 이영세 아버님의 고요함이 부럽기만 하다. 거기에다 차니콜라님의 공력도 빼놓을 수 없을 게다. 애찬실에서 그는 빵을 열심히 먹으면서 사람 좋은 웃음만 지었으니까. 조엘리아, 정요한님은 귤을 열심히 들었고^^.
무척 유익한 만남이었다. 이런 모임 자주 가지면 안 될까 싶다.
이 기회에 GFS회, 모임을 위해 애쓰신 교우님들께
고맙습니다.
뱀발: 지난 2월 28일 동대문교회 까페에 실었던 글. 당시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하려는 뜻에서 여러 교우님들의 이름 등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싣습니다. 맨 끝의 "고맙습니다"란 인사 다시 한번 꾸벅^.
오늘은 성당에서 나성권 시몬 신부님의 묵주 강연이 있었다.
GFS회 주최라 하니 결국은 어머니회가 여는 셈. 그래서인지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인 분들도 대개는 엄마들이다. 새삼 애찬을 준비하는 일상사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성공회 묵주'를 소개하랴 팔랴 부산하기만 한데, 짬을 이용한 사전 모임에서 묵주기도를 실연해보는 교우들도 예외없이 여성 분들이다.
마리아, 엘리자벳, 헬레나, 앵니스, 베로니카, 모니카, 에스터, 미리엄, 세실리아...이름만 들어도 뭔가 장엄해지지 아니한가. 이에 견줘 아버님들의 담화는 훨씬 '실용적'이시다. "어? 묵주? 난 이거 벌써 세 개째야. 우리 집에도 많고". "구슬은 전부 33개지. 무식한 애들이 이걸 알려나". "이거 얼마야? 8천원?"
그러는 한편으론 예의 고담준론도 오간다. "거 도올 선생은 좌우지간 아는 게 무진장이야. 난 그 사람 괜찮더라". "헌데 그 사람은 학자가 아니야. 자기 지식에 빠져 오만하게 세상사를 굽어본다는 데 우선 문제가 있어. 그게 어디 제대로 된 학자가 취할 바인감"(곁가지 얘기이지만, 문득 도올을 변호하고 싶어진다. 실상 오늘의 주제와 전혀 무관하지도 않다).
청중은 예순 명 정도. 이미 예견했듯 남자들은 소수다. 게다가 '당연직'이 태반이다. 전/현직 신자회장님, 사제회장님, 박완준님, 재정위원님, 디모데회 회장님 등의 면모가 당당하다. 그럼에도 의무이겠거니 하는 에누리에 빛이 바래(?) 그 신실함이 이래저래 '손해 보고' 들어간다.
오늘의 스승 나시몬 신부님. 그럴싸 해서 그런지 첫 인상이 참으로 해맑다. 시작부터 제절로 이러한 기류가 전파됐음인지 이앵니스님이 제의한다. "앞 좌석에는 잘 생긴 사람들이 앉으세요." 어떻게 하겠는가? 난 군말 못하고 겸손하게 뒷 좌석으로 퇴각했다. 동대문교회 관할사제 안철혁 신부님의 처지도 비슷하다. "나 신부님은 묵주기도의 전문가이십니다. 또 저보다 잘 생기셨고요!". 그런데 정작 나시몬의 자평은? "절 잘 보세요. 어딘가 산만하게 생겼죠?" 사이를 두지 않고 웃음을 터뜨리는 분들-여성 교우님들이다.
나시몬님의 강의는 쉽고 편안하다.
"현대인은 몹시 바쁩니다. 일에 쫓기고 스트레쓰에 치이고 걱정하느라 찌들어갑니다. 이럴 때 주님께 기대어 고요함 속에서 간절히 염원하는 데 묵주기도의 뜻이 있습니다. 오래 기도 드린다고 꼭 좋다고 볼 순 없고 간절하게 염원하는 게 중요합니다. 옛날 일이지만 전 꽤 노력했는데도 방언이란 걸 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묵주기도에서 평화를 체험하는데 시간은 대개 20분 정도 걸립니다."
모름지기 우리가 쓰는 언어가 사유의 틀을 이룬다는 건 상식에 가깝다. 그런 뜻에서 "현대인"과 "고요함"은 이미 날 선 질문이 된다. 여기에서 현대인이란 함의는 유비를 불러온다. 이를테면 현대와는 다른 고전적 인간이라든가 지금은 잃어버린 시원적 고향을 갈망한다든가.
예전은 형식을 중심 얼개로 삼는 바, 성공회 묵주기도는 이렇게 이루어진다.
묵주에는 모두 33개의 구슬과 하나의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 바로 위의 구슬이 초대구슬이고 나머지 4개의 큰 구슬은 십자구슬이다. 그리고 작고 제일 많은 28개(7 개씩 4 식)의 구슬을 주간구슬이라 한다. 기도하는 순서는 십자가부터 (1)초대구슬-(2)십자구슬-(3)주간구슬로 이어지며, (2)(3)번을 3바퀴 반복하고 다시 십자가로 귀환하면 끝난다. 그러는 동안 구슬 '징검다리들'과 십자가를 모두 합하면 숫자 100이 된다. 계산해보자. (2)(3)번을 3번 반복하면 96이 된다->[(7x4)+주간구슬4]X3=96. 여기에 맨 처음 '올라갈 때' 십자가 1+초대구슬 1을 합하면 98. 세번 반복하고 십자가로 내려올 제에는 주간구슬을 건너 뛰고 초대구슬 1+십자가 1로 내려가면 100. (만세!).
각 단계마다 기도문이 따른다.
(1) 십자가: (입 맞춘 후)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2)초대구슬: 사도신경. (3)십자구슬: 주 기도문. (4)주간구슬: 예수 기도-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5)초대구슬: 영광경-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이어 오늘 특강의 하일라이트라면 나시몬이 소개한 짧은 세 가지의 기도문. 간명해서 그런지 금방 머릿속에 쏙 들어온다.
1. 예수 기도(정교회 전통이라 한다)와 거의 같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2. 나의 주님, 나의 전부.
그럼 세번째는 뭘까?
그건 침묵이다...이건 단지 말없음일까. 아니면 고요함의 다른 이름일까. 침묵에선 높은 산정을 스쳐가는 적요의 바람소리가 난다. 그런데 그 경지조차 아닐 것이다...듣는 귀마저 없고 침묵이란 이름마저 없는 무경계의 가없는 세계일지 모른다. 거기에 열림, 투명함, 평화가 있나니. 그런데 난 왠일인지 조금 슬퍼진다^^. 그러하기에 온갖 멍에를 스스로 진 '현대인'으로선 그저 간구할 뿐인 그런 세계가 아닐까.
예수 기도와 관련, 나신부님의 추가설명이 있었다.
기도란 주님을 맞아들이는 능동적이고 기쁨에 가득찬 주체적 선포행위와 닮았다. 그렇다면 "죄인"은 좀 너무하지 않는가. 하여, "죄인" 대신 "저희들"로 하는 경우도 있다고. 아울러 자비를 꼭 불교적 용어로 볼 필욘 없으며 성경에도 자비란 말이 여러 군데에 나온다고. 이 점 나중에 애찬실에서 안스테파노님이 다시 자신의 견해를 펼치셨다.
아무래도 어머님들은 방법에 관심이 많으신듯 하다. 강의 도중 박 엘리자벳님이 던진 질문. "예수 기도"에서 "죄인"이나 "저희들" 대신 특정인을 거명하면 어떠하냐고. '손주새끼들'을 염두에 두셨을 게다. 아마도 정루시아가 더욱 예뻐지고 잘 되라고 기도하실려나 보다.
한 시간 넘게 걸린 강의가 끝난 후 애찬실에서 나 신부님께 몇 가지 주제를 여쭤봤다.
성공회의 묵주기도가 시작된 건 매우 늦은 1980년대. 가톨릭은 15세기라고. 어쨌거나 거룩함과 '신비'의 회복에 하나의 열쇠말이 있다고 느꼈다. 한편 의식으로서 묵주기도는 '개인적'이다. 예배의 장중한 질서와 성찬례의 '다중성'에 비춰본다면 말 그대로 미사는 집단적이다. 말하자면 이 양자는 서로 맞물리며 예전의 감응체계를 이룰 터이다. 나시몬님은 강의 때와 마찬가지로 귀 기울이셨고 많은 부분에서 내 질문에 선선하게 공감해주셨다.
가만 있자. 그러나 저러나 난 침묵의 기도를 벌써 까먹었는가 보다. 애찬실에선 말없이 밥 먹어야 하잖을까. 이 점에선 이영세 아버님의 고요함이 부럽기만 하다. 거기에다 차니콜라님의 공력도 빼놓을 수 없을 게다. 애찬실에서 그는 빵을 열심히 먹으면서 사람 좋은 웃음만 지었으니까. 조엘리아, 정요한님은 귤을 열심히 들었고^^.
무척 유익한 만남이었다. 이런 모임 자주 가지면 안 될까 싶다.
이 기회에 GFS회, 모임을 위해 애쓰신 교우님들께
고맙습니다.
뱀발: 지난 2월 28일 동대문교회 까페에 실었던 글. 당시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하려는 뜻에서 여러 교우님들의 이름 등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싣습니다. 맨 끝의 "고맙습니다"란 인사 다시 한번 꾸벅^.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