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인사 월드컵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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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 건너 숲 작성일 06-06-12 12:24 조회 18,139회 댓글 0건본문
"지구인의 축제" 월드컵이 오늘 독일에서 드디어 막을 열었다. 4년 전에는 한일 월드컵이란 이름으로 바로 우리 안방에서 축구경기가 열렸었다. 붉은 셔츠와 함성이 6월의 거리를 뜨겁게 달구었던 일이 정말 엊그제만 같다. 올림픽과 월드컵, 생각해 보면 이 두 가지 큰 행사를 불과 십수년만에 밀어붙였던 나라가 지구상에 또 어디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요 몇 십년에 두번이나 '세계'와 격정적으로 맞딱뜨렸다. 그리고 어쩌면 규모와 효과 면에서 그 두 가지는 단군 할아버지 이래 제일 강력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세계"란 표현은 모호하다. 왜냐하면 나를 벗어난 울타리 밖의 세계와 만나는 경험은 실로 다양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책이나 여행, 유학이나 모든 인적 물적 교류라든가 요즘엔 인터넷도 있다. 그러나 집단적 체험의 공간과 '충격'의 내면화에서 두 경우는 차이가 크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내게 올림픽과 월드컵은 쌍둥이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먼저 올림픽 얘기부터 잠깐. 지금은 기억마저 가물해져 간다. 1988년 잠실벌에서 펼쳐진 여름올림픽 때는 기쁨과 서글픈 감정이 엇갈렸다. 그땐 단연 압축경제성장의 신화가 집단최면 비슷하게 걸려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몇 해 전의 비극, '빛고을' 망월동을 쉽게 잊었다. 어렴풋하게 보리고개의 기억으로 상징되던 곤궁함은 금메달 사냥의 갈증으로 채워졌고.
빠리, 로스엔젤리스, 헬싱키, 암스테르담, 멜보른, 그리고 이웃도시 도꾜는 그때까지 우리들에게 풍요와 문명의 기호가 아니었던가 싶다. 마치 까마득한 옛날 손기정이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 벌판을 달렸듯이 올림픽은 어디까지나 그렇게 대리체험일 뿐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서울이 꿈처럼 끼어들었다. 희뿌연 전송사진을 감질나게 더듬는 대신 잠실과 한강은 온통 국화꽃에 휩싸인 채 마냥 행복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낡고 강고하기만 했던 관념의 얼개에도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다. 잠실벌을 행진하는 "쏘련"이나 "중공" 선수들에게서 많은 한국인들은 난생 처음(?) 사람냄새를 맡을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모든 길은 올림픽으로 통했고 지배담론은 위대한 국가/민족이라는 위압적인 틀로 재단되었다. 볼쌍 사납다는 이유로 노점상들은 길거리에서 내몰려야만 했다. 냉전의 그늘은 여전했고 여기저기에서 말끔하게 걷히지 않은 동원문화는 상상력을 옥죄었다. 가장 좋은 예를 들자면 그때 쏟아져나왔던 구호나 노래를 훑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손쉬운 예로 동과 서가 우정으로 서로 만나자는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 hands in hands"는 외국에서 빌려온 노래였다. 한국산 "호돌이"가 부르짖는 자가 만족의 외침에서 적어도 보편적 울림을 감지하기는 어려웠다. 애국심에 조건 반사식으로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싶진 않다. 그럼에도 오늘도 마냥 울려퍼지는 대~한민국 쿵짜자작작의 가락이 흥겹지만은 않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쌍팔년도'의 올림픽과 한일 월드컵은 여러 면에서 다를 것이다. 또한 2002년 월드컵 때와 지금도 많이 다를 것이다. 이를테면 풀뿌리 민주주의의 토대라든지 시민사회의 성숙도에서 그 차이는 작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지난 월드컵을 상징하는 가장 아름다운 광경을 들라면 나는 서슴치 않고 길거리 응원을 들겠다. 길거리 응원은 말하자면 광장(공동체)과 밀실(개인)이 행복하게 조우한 기막힌 은유로 내비쳤다. 찌들은 동원문화를 일거에 뒤짚는 전복의 유쾌함이 거기 있었다. 시청 앞 거리를 가득 매웠던 '붉은 악마들'에게선 일종의 해원굿의 신명을 느끼기도 했었다. 1987년 민주화를 부르짖던 바로 그 거리 위에서 말이다.
그런데도 난 아직도 월드컵 현상에 마음을 다아 주고 싶지가 않다. 밝은 면 못지 않게 어두운 그늘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왜 그럴까. 집단적 황홀경에서 깨어난 개인들의 어깨는 늘 쓸쓸하기만 하다. 일상에서의 일탈심리는 언제나 정치/사회적 무관심이나 무지와 이웃하지 않았던가. 이런 식의 잔치 이런 식의 맹목적 열정은 결국 단독적 주체로서의 개인이 설 자리를 끊임없이 훼방한다. 개인의 섬세한 층위가 존재하지 않으면 집단상징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의사 정체성이 기승을 부린다. 더구나 국가주의적인 선전기제가 작동할 때 그것은 타자를 배제시키는 데서 나 또는 우리를 찾으려 든다.
이쯤에서 잠깐 눈길을 돌려 보자. 아프리카의 토고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나라로 다가오는가. 아데르바이요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의 숙원인 "16깡"의 제물 이상도 이하도 아닌지 한번 자문해볼 일이다. "아프리카의 복병 토고만큼은 기필코 이겨야 한다"는 그 한국식 정복의 셈법에 과연 토고의 '세계'와 '인간' 아데르바이요가 들어 있을까. "태극마크"나 "전사"를 향한 열정이 어느새 공격적이고 비이성적인 배타심으로 빠지는 함정을 우리가 늘 경계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축구공 하나로 모든 세계인이 즐기는 잔치를 벌인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지금까지 월드컵 또는 올림픽은 언제나 '세계'를 표방해왔지만 그걸 곧이 곧대로 믿는 바보는 없다. 탈사회적이고 인종주의적 기제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데다가 거대기업 등 일부를 살찌우는 상업주의로 찌들어 있다. 마찬가지이다. 4년 전에도 그랬었다. 월드컵이 파장할 무렵 장갑차에 깔려 숨진 두 소녀 미선 효순을 기억하시는가. 지금도 월드컵 함성에 묻혀 지내는 동안 대추리 들판, 새만금 개펄, 한미 FTA 협상, 이라크 전장, '천성산 도룡용', 디제이의 방북, 살갗이 가무잡잡한 이주노동자들은 그대로 거기 있을 뿐이다.
월드컵은 세계와 만나는 큰 잔치마당이다. 세계는 넓고 둥글며 지구는 잘난 사람들만 으쓱거리는 곳이 아니다. 인류는 영어 이외에도 많은 말을 쓰며 살아간다. 월드컵이 보여줘야 할 '세계'는 잘 사는 나라들의 백인 남성이 쌓은 위계질서의 탑이 결코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아프리카까지 펼쳐지는 다양성의 드넓은 숲이다. 월드컵은 진정 즐거운 잔치가 되어야 한다. 발로 공을 차는 사람의 몸짓 하나에 지금 전세계가 환호하고 탄식한다. 호모루덴스(놀이인간)가 20세기에 만든 최고의 '발명품'가운데 하나가 축구라 하지 않는가. 눈을 크게 뜨고 '세계'를 만나야 하지 않을까. 아울러 그늘진 구석을 잊지 않으면서.
여기서 "세계"란 표현은 모호하다. 왜냐하면 나를 벗어난 울타리 밖의 세계와 만나는 경험은 실로 다양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책이나 여행, 유학이나 모든 인적 물적 교류라든가 요즘엔 인터넷도 있다. 그러나 집단적 체험의 공간과 '충격'의 내면화에서 두 경우는 차이가 크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내게 올림픽과 월드컵은 쌍둥이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먼저 올림픽 얘기부터 잠깐. 지금은 기억마저 가물해져 간다. 1988년 잠실벌에서 펼쳐진 여름올림픽 때는 기쁨과 서글픈 감정이 엇갈렸다. 그땐 단연 압축경제성장의 신화가 집단최면 비슷하게 걸려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몇 해 전의 비극, '빛고을' 망월동을 쉽게 잊었다. 어렴풋하게 보리고개의 기억으로 상징되던 곤궁함은 금메달 사냥의 갈증으로 채워졌고.
빠리, 로스엔젤리스, 헬싱키, 암스테르담, 멜보른, 그리고 이웃도시 도꾜는 그때까지 우리들에게 풍요와 문명의 기호가 아니었던가 싶다. 마치 까마득한 옛날 손기정이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 벌판을 달렸듯이 올림픽은 어디까지나 그렇게 대리체험일 뿐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서울이 꿈처럼 끼어들었다. 희뿌연 전송사진을 감질나게 더듬는 대신 잠실과 한강은 온통 국화꽃에 휩싸인 채 마냥 행복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낡고 강고하기만 했던 관념의 얼개에도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다. 잠실벌을 행진하는 "쏘련"이나 "중공" 선수들에게서 많은 한국인들은 난생 처음(?) 사람냄새를 맡을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모든 길은 올림픽으로 통했고 지배담론은 위대한 국가/민족이라는 위압적인 틀로 재단되었다. 볼쌍 사납다는 이유로 노점상들은 길거리에서 내몰려야만 했다. 냉전의 그늘은 여전했고 여기저기에서 말끔하게 걷히지 않은 동원문화는 상상력을 옥죄었다. 가장 좋은 예를 들자면 그때 쏟아져나왔던 구호나 노래를 훑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손쉬운 예로 동과 서가 우정으로 서로 만나자는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 hands in hands"는 외국에서 빌려온 노래였다. 한국산 "호돌이"가 부르짖는 자가 만족의 외침에서 적어도 보편적 울림을 감지하기는 어려웠다. 애국심에 조건 반사식으로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싶진 않다. 그럼에도 오늘도 마냥 울려퍼지는 대~한민국 쿵짜자작작의 가락이 흥겹지만은 않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쌍팔년도'의 올림픽과 한일 월드컵은 여러 면에서 다를 것이다. 또한 2002년 월드컵 때와 지금도 많이 다를 것이다. 이를테면 풀뿌리 민주주의의 토대라든지 시민사회의 성숙도에서 그 차이는 작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지난 월드컵을 상징하는 가장 아름다운 광경을 들라면 나는 서슴치 않고 길거리 응원을 들겠다. 길거리 응원은 말하자면 광장(공동체)과 밀실(개인)이 행복하게 조우한 기막힌 은유로 내비쳤다. 찌들은 동원문화를 일거에 뒤짚는 전복의 유쾌함이 거기 있었다. 시청 앞 거리를 가득 매웠던 '붉은 악마들'에게선 일종의 해원굿의 신명을 느끼기도 했었다. 1987년 민주화를 부르짖던 바로 그 거리 위에서 말이다.
그런데도 난 아직도 월드컵 현상에 마음을 다아 주고 싶지가 않다. 밝은 면 못지 않게 어두운 그늘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왜 그럴까. 집단적 황홀경에서 깨어난 개인들의 어깨는 늘 쓸쓸하기만 하다. 일상에서의 일탈심리는 언제나 정치/사회적 무관심이나 무지와 이웃하지 않았던가. 이런 식의 잔치 이런 식의 맹목적 열정은 결국 단독적 주체로서의 개인이 설 자리를 끊임없이 훼방한다. 개인의 섬세한 층위가 존재하지 않으면 집단상징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의사 정체성이 기승을 부린다. 더구나 국가주의적인 선전기제가 작동할 때 그것은 타자를 배제시키는 데서 나 또는 우리를 찾으려 든다.
이쯤에서 잠깐 눈길을 돌려 보자. 아프리카의 토고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나라로 다가오는가. 아데르바이요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의 숙원인 "16깡"의 제물 이상도 이하도 아닌지 한번 자문해볼 일이다. "아프리카의 복병 토고만큼은 기필코 이겨야 한다"는 그 한국식 정복의 셈법에 과연 토고의 '세계'와 '인간' 아데르바이요가 들어 있을까. "태극마크"나 "전사"를 향한 열정이 어느새 공격적이고 비이성적인 배타심으로 빠지는 함정을 우리가 늘 경계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축구공 하나로 모든 세계인이 즐기는 잔치를 벌인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지금까지 월드컵 또는 올림픽은 언제나 '세계'를 표방해왔지만 그걸 곧이 곧대로 믿는 바보는 없다. 탈사회적이고 인종주의적 기제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데다가 거대기업 등 일부를 살찌우는 상업주의로 찌들어 있다. 마찬가지이다. 4년 전에도 그랬었다. 월드컵이 파장할 무렵 장갑차에 깔려 숨진 두 소녀 미선 효순을 기억하시는가. 지금도 월드컵 함성에 묻혀 지내는 동안 대추리 들판, 새만금 개펄, 한미 FTA 협상, 이라크 전장, '천성산 도룡용', 디제이의 방북, 살갗이 가무잡잡한 이주노동자들은 그대로 거기 있을 뿐이다.
월드컵은 세계와 만나는 큰 잔치마당이다. 세계는 넓고 둥글며 지구는 잘난 사람들만 으쓱거리는 곳이 아니다. 인류는 영어 이외에도 많은 말을 쓰며 살아간다. 월드컵이 보여줘야 할 '세계'는 잘 사는 나라들의 백인 남성이 쌓은 위계질서의 탑이 결코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아프리카까지 펼쳐지는 다양성의 드넓은 숲이다. 월드컵은 진정 즐거운 잔치가 되어야 한다. 발로 공을 차는 사람의 몸짓 하나에 지금 전세계가 환호하고 탄식한다. 호모루덴스(놀이인간)가 20세기에 만든 최고의 '발명품'가운데 하나가 축구라 하지 않는가. 눈을 크게 뜨고 '세계'를 만나야 하지 않을까. 아울러 그늘진 구석을 잊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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