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부방 Worship and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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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 건너 숲 작성일 06-04-03 17:40 조회 15,832회 댓글 0건본문
It is pointless to defend such a chicken-and-egg argument. Whatever the merits of claiming logical priority for man's experience of God in worship, an experience which he later elaborates in terms of its intellectual implications, no historical community of faith now offers this pure option. Thought and worship have been going on together in the Church from very early on the morning of the first Easter. Both activities have influenced each other through two millennia.
The idea of an ecology of faith recognizes this organic situation. Pioneer naturalist John Muir summed it up beautifully, in fact, when he said (in another connection) that as soon as he tried to pick out anything by itself, he found it hitched to everything in the universe. The question of how liturgy and theology are interrrelated is nevertheless forced upon us by our description of the temporal and dynamic phenomena in worship. Have we been unduly influenced by the theological mood of the day?
In part, no doubt, the new theological talk is yet another reflection of our general cultural crisis. The future tense, as George Steiner noted in a review of the Biological Time Bomb, is always a scandal. Current events conspire to make it also a terror. "I think the signs are all pointing the wrong way." C.P. Snow said not long ago ; "the objective grounds for hope have gotten less and the objective grounds for non-hope have gotten stronger." A Nobel prize physicist has asked: "What is left to hope for?" As the "Generation in Search of a Future" appears to know very well indeed, man's chance to go on is in question.
Responding to this mood of profound hopelessness, prophets of hope have arisen-indeed a whole school of hope, with Marxist, Humanist, and Christian members of the faculty. By rescuing Marxist eschatology from determinist interpretations, Ernst Bloch unquestionably did much to stimulate present rethinking of the concept. By listening to Bloch, theologians like Harvey Cox have found ways out of the God-is dead cul de sac." We will listen, however, to three other current and hopeful voices-those of Eric Fromm in the remarkable manifesto, The Revolution of Hope; of Jurgen Moltmann in Theology and Hope; and of Dietrich Ritschl in his Memory and Hope. All three writers say something directly about worship, but in different tones.
여기에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논쟁을 옹호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인간이 예배에서 신을 체험하고 나중에 지적인 함의로 다듬는 것에 논리적 우선순위를 부여하려는 주장의 공과가 어떠하든, 역사적인 신앙 공동체는 지금 그러한 순수한 선택권을 제시하지 않는다. 사유와 예배는 교회에서 첫 부활절 아침 일찍부터 함께 진행되어 왔으며 양쪽의 활동은 2000년 내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왔다.
신앙의 생태학이란 이념은 사유와 예배 사이의 이와 같은 유기적 상황을 인정한다. 선구적인 자연주의자 죤 뮤어가 사실상 그 상황을 훌륭하게 요약했다. 그는 "어떤 것을 그 자체로 이해하려고 시도하자마자 그것은 우주의 모든 것에 얽혀있음을 발견했다"고 말했다(다른 주제와 관련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과 신학이 어떻게 상호관련하느냐의 물음은 예배에서 일시적이고 역동적인 현상을 우리가 어떻게 묘사하느냐에 따라 우리를 강제한다. 우리는 한갓 그날 그날의 신학적 기분에 의해서 부당하게 영향을 받아왔던가?
부분적으로, 새로운 신학적 이야기는 우리가 겪는 일반적인 문화적 위기의 다른 반영임은 의심할 바 없다. 죠지 슈타이너가 <생물학적 시한폭탄>의 논평에서 언급했듯이, 미래시제는 항상 수치이다. 또한 지금의 사건들은 미래시제를 공포로 만드는 데 공모한다. C.R. 스노우는 얼마 전에, "나는 신호들이 잘못된 길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희망을 위한 객관적 터전은 점점 더 약해지고 희망 아닌 것을 위한 객관적 터전은 더욱 강해졌다" 고 말했다.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는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남겨진 것이 무엇인가?" 라고 질문했다. "미래모색을 위한 세대GSF"가 잘 알고 있듯이 인간이 계속 나아갈 기회는 지금 의문에 싸여있다.
이처럼 깊은 절망의 풍조에 응답하면서 희망의 예언자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정말이지 희망의 모든 학파를 구성하는 마르크스주의자, 휴머니스트, 대학 학부의 기독교 구성원들이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종말론을 결정론적 해석에서 구출함으로써 그 개념의 현대적인 재해석을 자극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하비 콕스 같은 신학자는 블로흐에 귀기울임으로써 신은 죽었다는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는 길을 발견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세 갈래로 난 희망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에릭 프롬의 뛰어난 선언 <희망의 혁명>의 목소리, 유르겐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의 목소리, 디트리히 리츨의 <기억과 희망>의 목소리다. 세 작가는 예배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그러나 다른 음조로 그 무엇인가를 말한다.(옮긴이: "강숲")
또 잔소리:
1. 바로 전(24번)에 올린 글과 똑같은 책(저자:미국 신학자)에서 뽑았습니다.
2. 윗 글에 흥미가 없으신 분도 있으시리라 봅니다(못마땅하신 분마저?^^). 하면서도 그리스도교와 관련, 현대사상의 주요한 한 흐름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 올렸습니다. 이번 텍스트에도 알아두면 좋을 학자들의 이름과 기본용어가 많습니다.
3. 이런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겝니다. '디게' 어렵고 폼나는 학술논문이나 시(정말 어렵지요!)를 턱하니 올려놓고 남이야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좋아하는 경우^^.
하지만 저는 그런 생각 쬐끔도 없습니다. 다만 뭐랄까 기본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해서이죠. 어쨌든 이 책(The Future Present)의 글은 여기에서 그치겠습니다. 더 이상 안 올린다는 말씀이죠. 중요한 건 소통입니다. 그래야 외국어이든, 잠들 때마다 할머니가 전해주신 호랑이 얘기이든, 엄마말이든, 아 그렇구나 하고 서로 통하는 게 오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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