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봄 - 14면] 2000만분의 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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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1-03-09 15:12 조회 7,368회 댓글 0건본문
2000만분의 일 (2)
최금희 / 셋넷학교
본 원고는 2006년 제1차 새터민 정착사례 수기 공모 최우수상 수상작으로서, 최금희씨의 허락하에 4회에 걸쳐 연재 예정이다.
눈물도 잠시 우리를 맞으러 나온 한국 정부 사람들의 딱딱한 태도에 순간 긴장을 하였다. 죄인마냥 똑바로 세워놓고 사진을 찍고 몸수색과 어러가지 검열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18살 나에겐 싫었다. 그리고 이어진 조사……. 집이 어디이고 어떻게 살았고 중국에서 무엇을 했고, 식당에서 일했다고 하니 밤에만 일하는 업소가 아니냐고 묻기도 하였다. 그것보다 더 기가 막힌 질문은 부모님이 진짜냐는 것이었다. 순간 한국에 대한 나의 환상은 찬물을 끼얹듯 사라졌고 남은건 자존심 하나뿐이었다.
“선생님은 자식이 없습니까?” 그러자 질문을 하던 선생은 아무렇지 않은 기색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부드럽고 친절한 한국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그동안 나는 한국에 대하여 많은 것을 몰랐다. 그랬기에 아직 세상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나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그렇게 조사를 끝내고 하나원이라는 곳에서 3개월 동안 지내야 했다. 한국사람, 북한사람, 한반도 한민족이라는 말이 이상할 정도로 우리는 달라져 있었다. 북한에 대하여 모르고 있는 한국 사람이 많았고 미디어에서 보이는 북한 사람은 배고픔에 굶주리고 그래서 탈북을 시도하고 중국에서 사람 취급 받지 못하고 산다는 것이 한국 사람들이 알고 있는 북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랬기에 북한 사람이라고 하면 놀라는 건 기본이었다. 그래서 하나원은 아직도 외부인 출입금지이고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하나원에 있는 사람들을 무섭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원에서 배운 건 솔직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내가 받았던 한국에 대한 나쁜 시선으로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나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어디를 가야하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하나원을 졸업하고 서울에 우리 가족은 짐을 풀었다. 짐이라고 해봤자 하나원에서 준 가방 몇 개와 옷가지 몇 개뿐이었다. 그래도 우리 집이 생기고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있는 마을이 생겨서 기뻤다. ‘그래……. 이제 시작인거야. 공부도 할 수 있고 친구들도 사귈 수 있어 이젠 나도 떳떳한 한국사람 인거야.’ 마음속으로 여러 번 다짐 하면서 나는 검정고시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를 담당했던 형사님을 따라 점정고시 학원에 등록한 나는 학원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설렘도 잠시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는 한국 친구들의 모습을 보고 그만 기겁하고 말았습니다. 수업시간에 몇 번씩 들락거리고 쉬는 시간에 14살밖에 되지 않는 아이가 담배를 피우고 있고 어린 여자아이는 진한 화장에 담배까지 어머니가 준 학원비를 노는데 써 먹기까지……. 처음 중국에 넘어가서 비키니 입은 여자 사진을 보고 팔려가는 줄로만 알았던 순진한 나는 어느 정도 중국에서 살면서 익숙해졌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러한 모습을 처음 접한 나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이런 아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저런 아이들이 내가 북한에서 왔다고 한다면 뭐라고 할까? 놀릴까? 그래! 분명히 놀릴 거야. 아무도 나와 친구가 되지 않으려고 할 거야…….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2달 만에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래! 돈을 벌거야. 돈이 많으면 누구도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을 거야.’ 무작정 돈을 벌려고 마음먹은 나는 집 근처에 있는 한 분식집에 구인장을 보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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