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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가을 - 13면] 2000만분의 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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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1-03-05 14:34 조회 8,057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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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제1차 새터민 정착사례 수기 공모 최우수상 수상작)

2000만분의 일(1)

최금희

우리 가족이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 97년은 14살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때까지 친구들과 공부하고 비록 배고픔이 많았지만 고향을 떠난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탄광마을 아오지에서 자란 나는 4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어릴 적 친구들과 강가에 나가 홀랑 벗고 수영도 하고 뒷산에 올라가 살구도 따먹고 가슴에 커다란 종이꽃 달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내 나라 내 민족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으면서 자란 나에게 고향은 떠날 수 없는 곳이었다. 김일성 사망 이후 급속도록 굶주림이 시작된 시기에도 친구들과 함께 놀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학교생활에 충실했다. 이 고난만 넘기면 좋은날이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던 어린 나에게 고향을 떠난다는 부모님의 말은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14살 어린 나는 부모님 없이는 하루도 못살 것 같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을 따라 97년 2월 차가운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

낯선 땅 중국에서 우리 가족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숨어서 지내야하는 신세였고 경찰들만 보면 죄인마냥 숨어야했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도 받고 때론 쫓기기도 하면서 우리 가족은 한국행을 시도했다. 대사관도 들어갔다가 중국 돈 500(한화 55000)원을 받고 나와야했고, 러시아를 통해 가려다가 얼어 죽을 가능성이 많다는 권유로 또 다시 길을 떠났고, 배를 타고 오려다가 3일 동안 바닷물을 실컷 먹어야 했고, 결국은 실패로 돌아가 감옥까지 갔어야했다. 다행히 우리 가족이 불쌍했는지 풀어주었고 한국행을 포기하고 일 년 동안 딸 셋이서 일을 하여 집안 살림과 막내 남동생을 학교에 보내기도 하였다. 그렇게 살아가려고 했지만 여전히 우리 가족의 안전은 누구도 보장해 줄 수 없었다.

그러다 2001년 우리 가족은 다시 한 번 한국행을 시도했고 중국 남방을 거쳐 미얀마를 통해 우여곡절 끝에 한국행에 성공하게 되었다. 2001년 4월 비행기에서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바라보면서 엄마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고 나도 감정이 솟구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또 닦았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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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넷학교는 탈북청소년들을 대안교육공동체이다. 우물가프로젝트팀은 셋넷학교 교장선생님이신 박상영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인연으로 졸업식에도 가보고 공연도 가보았다. 그들의 모든 몸짓은 아름답고 힘찼으며, 영혼은 자유로왔다.

사진: 2009년 9월 26일 압구정 예홀에서 공연한 ‘다르거나 혹은 같거나, 내일을 꿈꾸며!’ 후에 짤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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